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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만

Seongman Lim

흔

2026 혼합토, 무시유 작품별 상이

“흔(痕)”은 물레로 성형한 하나의 기 형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업이다. 여기서 기는 물이나 음식을 담기 위한 기능적 그릇이라기보다, 시간과 흔적을 담는 하나의 몸체로 사용된다. 기는 안과 밖을 동시에 가지는 구조이며, 내부의 빈 공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시간과 기억을 품는다. 이 빈 공간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사라진 것의 자리이자, 다시 무언가가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읽힌다. 작품의 표면에 붙은 여러 피스들은, 판을 밀고 접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각들이다. 이 조각들은 마치 기의 몸체 안에 축적된 압력과 시간이 옆구리를 밀고 터져 나온 흔적처럼 보인다. 따라서 피스를 붙이는 행위는 장식적인 추가가 아니라, 내부에 쌓인 시간과 압력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하나의 기가 시간과 압력을 담는 몸체라면, 표면에 붙은 피스들은 그 몸체 안에 축적된 흔적이 밖으로 밀려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복적으로 밀리고 접힌 판의 결은 특정한 자연물을 직접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시간이 축적되며 만들어지는 곡선과 구조에서 출발한다. 나무의 나이테, 지층, 침식된 암석, 생물의 조직처럼 자연은 오랜 시간 동안 압력과 변화를 받아들이며 고유한 선과 층을 남긴다. 작품의 표면에 드러나는 결 역시 흙이 밀리고 눌리고 접히는 과정에서 생긴 물리적 흔적이다. 이러한 선들은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남은 시간의 기록이며, 흙이 압력을 받아들이고 변형된 결과이다. 어둡고 거친 표면은 폐허, 탄화된 물질, 오래된 지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어두운 표면은 단순히 파괴나 소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표면을 따라 흐르는 결, 깊게 파인 구멍, 내부로 이어지는 틈은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머물 수 있는 자리로 남는다. 작품은 마치 죽은 물질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여전히 움직임과 생성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이 작업에서 미래는 매끈하고 완성된 기술의 풍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는 현재의 행위와 압력, 상처와 회복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표면으로 상상된다. 인간이 남긴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흙과 지구의 기억 속에 다른 형태로 남는다. 관람자는 이 작품을 하나의 그릇이나 단순한 조형물로 단정하기보다, 표면에 남은 결, 기의 내부에 형성된 빈 공간, 몸체 밖으로 밀려 나온 듯한 피스들의 관계를 천천히 따라가며 바라보게 된다. 이 작품은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보다, 무엇이 남았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흔적 앞에서 인간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 속에 어떻게 기록되는지, 사라진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 다시 생명의 자리로 돌아오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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